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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정치·사회적인 배경 subtitle 오랜 시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불법 강점과 전쟁범죄 책임은 극동국제군사재판(1946~1948)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을 거치며 제대로 추궁되지 않았다.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동북아 안보와 아시아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반공의 방파제’로 삼으며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뒤이은 미군정과 분단, 한국전쟁, 독재체제 등으로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와 관련된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할 수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1965)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전쟁범죄로 인한 피해 사항은 제외되었다. 이런 국내외 상황과 오랜 가부장적 문화가 결합되어 피해자들의 침묵은 지속된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의 여성운동은 점차 독자적 ‘여성문제’에 집중하며 성장한다. 분단 극복과 민주화를 주요 과제로 설정하면서도 우리 사회 뿌리 깊은 성적 편견과 성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당시 여성들은 다양한 여성단체를 조직하며 가정폭력, 성폭력, 인신매매,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여성노동자 차별 문제 등을 전면적으로 제기한다. 2021년 8월 21일 -
2부 | 김학순 삶의 궤적을 따라 섹션02설명입니다. 김학순은 1924년 중국 길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고향 평양에 돌아와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마친다. 어머니의 재가를 계기로 기생집 수양딸이 되어 평양 기생권번 과정을 마친 후 양아버지와 중국으로 돈벌이를 나서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 연행된다. 당시 나이 17세였다. 약 4개월간 일본군위안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조선인 조○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와 함께 중국 일대를 전전하다 상하이에 정착해 두 아이를 출산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귀국한다. 2021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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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룸 | 파동과 나비효과 섹션03설명입니다. ‘최초의 공개증언자’였으며 한 명의 ‘인권운동가’였던 김학순의 말은 커다란 해일이 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이곳에서는 첫 공개 증언과 각종 캠페인, 수요시위, 증언집회, 인터뷰 등을 통해 당당히 외쳤던 김학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법적 배상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만든 ‘아시아여성기금’(국민기금)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며 전쟁범죄의 책임자 일왕의 사죄를 요구하던 김학순의 모습을 확인할수있다.특히국내최초로공개되는첫일본증언집회당시 김학순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그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른 피해자들, 활동가들과 전 세계 시민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며 연대로 연결되었는지, 전쟁책임을 부인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희망과 변화를 위한 기억과 행동으로 확장되어 왔는지 확인해 보자. 2021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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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의 용기를 계승하여 섹션04설명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뜨거운 마음으로 힘껏 손잡고 소리치게 했던 김학순. 김학순 공개증언 이후 제2, 제3의 김학순이 등장했다. 김학순들은 무기력한 피해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같은 일을 미래세대가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의지는 다른 전시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나비기금’이 되어 날아올랐고, 평화의 소녀상은 전시 성폭력을 알리고 여성인권의 메시지를 담은 상징물로 세계 곳곳에 굳건히 세워지고 있다. 2021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