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정치·사회적인 배경

오랜 시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불법 강점과 전쟁범죄 책임은 극동국제군사재판(1946~1948)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을 거치며 제대로 추궁되지 않았다.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동북아 안보와 아시아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반공의 방파제’로 삼으며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뒤이은 미군정과 분단, 한국전쟁, 독재체제 등으로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와 관련된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할 수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1965)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전쟁범죄로 인한 피해 사항은 제외되었다. 이런 국내외 상황과 오랜 가부장적 문화가 결합되어 피해자들의 침묵은 지속된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의 여성운동은 점차 독자적 ‘여성문제’에 집중하며 성장한다. 분단 극복과 민주화를 주요 과제로 설정하면서도 우리 사회 뿌리 깊은 성적 편견과 성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당시 여성들은 다양한 여성단체를 조직하며 가정폭력, 성폭력, 인신매매,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여성노동자 차별 문제 등을 전면적으로 제기한다.

한편,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 체제에 저항하며 여성노동자 생존권 투쟁 지원에 앞장섰던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이하 한교여연)는 ‘기생 관광(일본인 성매매 관광)’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여성단체였다. 동시대 여성들이 당한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홀로 꾸준히 자료를 모으던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는 민주화투쟁에 헌신하던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이자 오랜 벗이었던 이이효재의 소개를 통해 〈한교여연〉의 조직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김신실, 김혜원과 함께 1988년 2월 보름간 일본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 등 조사활동을 실시한다. 연구 결과는 같은 해 4월 〈한교여연〉이 주최한 제주도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에서 발표된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국내외 여성들은 일제 식민지 시기 여성이 입은 고통에 공감하며 “치욕과 분노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이후 〈한교여연〉에는 〈정신대문제연구위원회〉가 설치되고 1990년 〈정신대연구회〉로 발전된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군의 관여를 부인하는 일본 정부인사의 망언은 계속된다. 이에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항의서한을 보내고 기자회견을 하지만 일본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직적 대응을 위한 단체 결성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1990년 11월 16일, 〈한교여연〉, 〈정신대연구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37개 여성운동단체들과 다양한 시민, 종교, 학생 단체들이 참여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결성된다.

정치적 변동

시민운동의 변화

1945

1945

광복

1945

건국부녀동맹 결성 \ 조선부녀총동맹 결성

1946 ~ 1948

1946 ~ 1948

극동국제군사재판 개최

1951

195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1967

1967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이하 한교여연) 창립

1973

1973

한교여연, 기생관광 반대 성명서 발표하고 일본여성단체들과 교류

1974

1974

마츠이 야요리(2000년 법정 주도), 일본 '아시아여성의모임' 발족하여 기생관광과 재일조선인 차별 반대

1981

1981

윤정옥, 한국일보 '끌려간 사람들' 기사 연재를 통해 오키나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봉기 이야기 보도

1982

1982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

1983

1983

한국여성의전화 결성, 여성평우회 결성

1984

1984

한교여연, 전두환 방일 맞이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서한 발송

전두환대통령 일본방문 즈음한 우리의 입장, 1984.8.23., 문서, 기증 윤영애

전두환대통령 일본방문 즈음한 우리의 입장, 1984.8.23., 문서, 기증 윤영애

1984

한국, UN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 협약' 가입

1986

기독여민회 결성

1986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상, “한일합방은 한국측에도 책임이 있다”

1987

1987

6월 민주항쟁

1987

한국여성민우회 결성,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결성

1988

1988.2.

윤정옥·김혜원·김신실, 후쿠오카, 큐슈,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 도쿄, 사이타마, 삿포로 등 방문하여 '정신대' 문제 조사

좌측부터 윤정옥, 김혜원, 김신실, 1988.2., 사진

좌측부터 윤정옥, 김혜원, 김신실, 1988.2., 사진

1988.2.

'성추행 가해자 혀 절단 사건' 발생

1988.4

오쿠노 세이스케 국토청장관, 태평양전쟁 관련 일본의 침략 사실 부인

1988.4.

윤정옥, 한교여연 주최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에서 '정신대' 문제 조사결과 보고

제주도에서 개최된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 1988.4.21-23., 사진

제주도에서 개최된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 1988.4.21-23., 사진

1988.4.

윤정옥, 한교여연 주최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에서 '정신대' 문제 조사결과 보고

여성과 관광문화 자료집, 1998.4.21-23., 문서

여성과 관광문화 자료집, 1998.4.21-23., 문서

1988.2.

한교여연, 교회와사회위원회 산하 '정신대문제연구위원회' 설치하여 자료 수집과 추모비 제작 추진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1988

니시무라 도시조 의원, “한일합방은 잘된 일”

1989

1989

히로히토 일왕 사망

1988.4.

한교여연, '정신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

일본 히로히또 국왕 사망에 대한 한국교회여성의 입장, 1989.1.23., 문서, 기증 윤영애

일본 히로히또 국왕 사망에 대한 한국교회여성의 입장, 1989.1.23., 문서, 기증 윤영애

1989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천황 전쟁책임 없다”

1989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일법원 합헌 판결

1989

베를린 장벽 붕괴

1990

1990.1

윤정옥,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연재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육필 원고, [1990], 문서, 기증 윤정옥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 육필 원고, [1990], 문서, 기증 윤정옥

1990

1990.5.18.

한교여연·여연·여대생대표자협의회,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맞이 기자회견 개최, 일본 정부에 사죄 요구 성명서 발표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맞이 기자회견, 1990.5.18., 사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맞이 기자회견, 1990.5.18., 사진

1990.5.25.

노태우 대통령, 방일하여 '강제연행 한국인 명단' 공개 요구

제1차 한일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가이후 총리, 1990.5.26.,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제1차 한일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가이후 총리, 1990.5.26.,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1990.6.6.

사회당 모토오까 쇼지 의원,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강제 연행과 '종군위안부'에 대한 정부 조사 요청

1990.6.6.

시미즈 쓰타오 노동성 직업안정국장, “위안부는 민간업자의 관리하에 있었으며 실태 조사는 어렵다”

1990.7.10.

윤정옥, '정신대문제연구위원회'를 '정신대연구회'로 전환하고 한교여연에서 독립

1990.10.17.

정신대연구회, 37개 여성단체와 함께 기자회견 개최하고 한일 정부에 공개서한 송부

기자회견 현장, 1990.10.17., 사진

기자회견 현장, 1990.10.17., 사진

1990.10.29.

일본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종군위안부문제 간담회’ 개최하고 외무성에 공개서한 전달

1990.11.16.

37개 여성단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결성(회장 윤정옥, 서기 김혜원, 회계 김신실, 실무 윤영애와 방숙자)

기독교회관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개최한 현판식, 1992.11.16., 사진

기독교회관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개최한 현판식, 1992.11.16., 사진

1990.12.

윤정옥, 도쿄 YWCA에서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여성을 대상으로 '정신대' 문제 강연

1991.1.

'일본 '종군위안부문제를 생각하는 모임' 결성

1991.1.8.

정대협, 가이후 도시키 수상 방한 맞이 여성계 입장 성명서 발표 및 시위

1991.3.

일본 노동성, '강제연행 한국인 명단' 공개

1991.4.1.

와카바야시 유키노리 노동성 직업안정국장, “조사를 했으나 강제동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1991.4.

정대협, 윤정옥·박순금(한교여연 회장)·이효재(여연 회장)을 대표로 하는 공동대표 제도로 전환

1991.4.24.

일본대사관의 오노 마사아키 참사관, '일본 정부가 조사했으나 여성을 강제 동원한 사실이 없고,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 문제가 해결되었다'

1991.5.18.

오사카 재일조선인여성들의 '조선인종군위안부문제를 생각하는 모임' 결성

1991.5.28.

정대협, 서울에서 '정신대 문제에 관한 강연회' 개최

정신대 문제에 관한 강의, 1991.5.28., 사진

정신대 문제에 관한 강의, 1991.5.28., 사진

1991.5.31.

정대협, 도쿄 '제1차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서 위안부 문제 보고

1991.7.

정대협, 국회에 '정신대문제 해결을 위한 청원서' 제출

국회 청원을 위해 한교여연에서 열린 기자회견, 1991.7.23., 사진

국회 청원을 위해 한교여연에서 열린 기자회견, 1991.7.23., 사진

세상밖으로

〈정대협〉이 결성되고 난 이후에도 ‘군의 관여’나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등 일본 정부의 부인이 계속되자, 분노한 관계자들은 〈한교여연〉이 오랫동안 지원했던 원폭 피해자들을 통해 피해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원폭 피해자 1세 이맹희의 소개로 나타난 생존자 김학순을 만나게 된다. 김학순은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국민모두가과거를잊은채일본에만매달리는것을보니도저히참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증거’가 세상에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억눌러져 있던 다른 여성들이 침묵의 협곡을 건너 비로소 피해생존자라는 사회적 형체를 입고 하나둘 드러나게 된다.

당시 국제 정세 또한 요동치고 있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1989)으로 식민지와 전쟁에 대한 자성과 관심이 증폭했고, 오랜 냉전체제가 붕괴되었다. 남북한도 UN에 동시 가입(1991)하게 된다. 오랜 군사독재체제의 붕괴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던 국내 상황과 더불어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정치적 변동

시민운동의 변화

1991

1991.8.14.

김학순,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공개증언

1991.9.18.

남북한 UN 동시 가입

UN가입 신청을 위한 UN헌장 의무수락선언서에 서명하는 노태우 대통령, 1991.7.19.,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UN가입 신청을 위한 UN헌장 의무수락선언서에 서명하는 노태우 대통령, 1991.7.19.,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1991.9.18.

정대협, 정신대 신고전화 개통

1991.10.18.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 사망

1991.11.3.

도쿄 재일조선인여성들의 '종군위안부문제 우리여성네트워크' 결성

1991.12.

문옥주·김옥선, 정대협에 일본군'위안부' 피해 신고

1991.12.6.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김학순 등 피해자들과 함께 도쿄지방재판소에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 제소

1991.12.6.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 '정부가 관여했다고 하는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일본 정부가 정신대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어렵다'

1991.12.8.

일본의 진주만 공격 50주년

1991.12.10.

한국 외무부, 주한 일본대사에게 가토 고이치 발언 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진상규명 요청

1991.12.21.

일본군의 관여를 증명하는 연합군 문서 발견

SEATIC Interrogation Bulletin No. 2(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 심리전 심문회보 제2호), 문서, 출처 서울기록원

SEATIC Interrogation Bulletin No. 2(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 심리전 심문회보 제2호), 문서, 출처 서울기록원

1991.12.26.

소련 해체

1992

1992.1.

김복동, 정대협에 일본군'위안부' 피해 신고

1992.1.

일본군의 관여를 증명하는 연합군 문서 발견

陸軍省 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ニ關スル件(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문서, 출처 WAM

陸軍省 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ニ關スル件(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문서, 출처 WAM

1992.1.8.

정대협,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시작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 모습, 사진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 모습, 사진

1992.1.8.

정대협,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시작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한 김학순, 사진, 기증 양징자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한 김학순, 사진, 기증 양징자

1992.1.13.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경영 등에 일본군의 관여 인정

1992.1.14.

일본여성단체, '위안부 110번' 전화 개설

1992.1.14.

일본여성단체, '종군위안부 문제 행동네트워크' 발족

1992.1.17.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죄

1992.2.

정대협, UN 인권위원회 위안부 문제 상정을 위한 미국 홍보활동 전개

1992.8.

북한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 발족

1992.1.8.

정대협,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개최

한국, 필리핀, 타이완, 타이, 홍콩, 일본 6개국이 참가한 제1회 아시아연대회의, 1992.8.10~11., 사진

한국, 필리핀, 타이완, 타이, 홍콩, 일본 6개국이 참가한 제1회 아시아연대회의, 1992.8.10~11., 사진

1992.1.8.

정대협, UN 인권소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보고

UN 인권소위원회에서 증언하는 황금주, 사진

UN 인권소위원회에서 증언하는 황금주, 사진

1992.12.

'정신대할머니 생활기금 모금 국민운동본부' 발족

1992.12.

'워싱턴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발족

1992.12.25.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등 10명, 야마구치 지방법원 시모노세키지부에 소송 제기(관부재판)

1993

1993.1.23.

일본 '송신도 할머니를 지원하는 모임(재일조선인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결성

1993.2.

정대협, UN 인권위원회 참석

1993.3.13.

김영삼 대통령, '일본 정부에 물질적 요구 않고 한국 정부가 직접 피해자 지원하겠다'

1993.6.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

1993.6.

정대협, 비엔나 세계인권회의 참석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발언하는 김복동, 1993.6., 사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발언하는 김복동, 1993.6., 사진

1993

UN 인권소위원회 특별보고관 테오 반 보벤, '인권과 자유에 중대한 침해를 입은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 및 회복의 권리에 관한 연구보고서' 제출

Study concerning the right to restitution, compensation and rehabilit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1993.7.2., 문서

Study concerning the right to restitution, compensation and rehabilit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1993.7.2., 문서

1993.8.4.

한국 외무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한일 외교현안으로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방침

1993.8.4.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정부의 관여 시인하는 담화 발표

1993.10.

'제2차 아시아연대회의 개최

1993.12.

UN '여성에 대한 폭력 철폐 선언' 채택

1994

1994.5.

나가노 시게토 법무장관, 침략전쟁 부정하고 일본군'위안부'를 공창으로 표현

1994.7.

일본, 민간모금을 통한 위로금(償い金) 지급 구상

1994.9.

정대협, 일본 민간 위로금(償い金) 반대 기자회견 및 집회 개최

국민모금에 의한 위로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 1994.6., 사진

국민모금에 의한 위로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 1994.6., 사진

1994.11.22.

국제법률가위원회(ICJ), 일본 정부에 피해자 배상 조치 및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제소 수용 등 권고

1995

1995.2.

제3차 아시아연대회의 개최

1995.7.

UN 인권소위원회 특별보고관 린다 챠베즈, '전시 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관행에 관한 연구보고서' 제출

Working paper on the situation of 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like practices during wartime, including internal armed conflict, 1995.7.13., 문서

Working paper on the situation of 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like practices during wartime, including internal armed conflict, 1995.7.13., 문서

1995.7.19.

일본, 국민기금 발족

1995.7.19.

정대협 등 국내외 43개 단체, 국민기금 발족 반대성명 발표

1995.8.

무라야마 도이치 총리,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담화 발표

1995.9.

정대협,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참석

1995 여성에 대한 NGO 포럼, 1995.9.4.. 사진

1995 여성에 대한 NGO 포럼, 1995.9.4.. 사진

1996

1996

UN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전쟁 중 군대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 일본 조사 보고서' 제출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1996.1.4., 문서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1996.1.4., 문서

1996.3.

국제노동기구(ILO),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 권고

1996.3.

'제4차 아시아연대회의 개최

1996.4.19.

UN 인권위원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채택

1996.5.29.

정대협, 일본대사관에 국민기금 철회 요구 항의서한 전달

1996.7.

정대협, 일본 전역에서 '피해자와 함께하는 국민기금 반대 집회' 개최

96 평화를위한 증언 집회, 1996., 사진

96 평화를위한 증언 집회, 1996., 사진

1997

1997.1.15.

김영삼 대통령, 일본에 국민기금 지급에 대한 유감 표시

1997.11.18.

한국 국회, 일본 전범 출입국 금지를 위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 의결

1997.12.16.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공개증언한 김학순 별세

1998

1998.4.

'제5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결정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영성국제법정 보고서, 문서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영성국제법정 보고서, 문서

1998.10.

한국, 북한, 일본 위안부 문제 공동합의문 채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