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모진삶을 거쳐

김학순은 1924년 중국 길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고향 평양에 돌아와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마친다. 어머니의 재가를 계기로 기생집 수양딸이 되어 평양 기생권번 과정을 마친 후 양아버지와 중국으로 돈벌이를 나서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 연행된다. 당시 나이 17세였다. 약 4개월간 일본군위안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조선인 조○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와 함께 중국 일대를 전전하다 상하이에 정착해 두 아이를 출산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귀국한다.

서울 장충단 수용소에서 첫 아이를 병으로 잃고,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다 둘째 역시 사고로 세상을 떠나보낸 후 전라도로 거취를 옮긴다. 이후 서울 충신동에서 남의집살이와 취로사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김학순은, ‘군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정부의 발표에 분노한다. 그리고 1991년 7월, 교회에서 알게 된 원폭피해자 이맹희의 소개로 〈정대협〉을 찾아오게 된다.

당시 〈정대협〉은 일본의 망언에 대응할 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피해자의 등장을 열망했지만, 막상 피해당사자를 대면하는 순간 그가 겪을 또 다른 고초를 염려하여 공개적으로 나서줄 것을 차마 요청하지 못했다. 김학순의 적극적 의사에 따라 1991년 8월 14일, 피해자의 첫 공개증언이라는 역사적 순간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성폭력'이란 공식 용어는 물론, 피해자 보호에 대한 법·제도조차 없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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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1세

1924.10.20. 중국 지린 출생, 아버지를일찍여읨

김학순의 제적초본(구 호적초본), 1980년대, 종이

김학순의 제적초본(구 호적초본), 1980년대,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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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세

아버지의 고향인 평양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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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8세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에 4학년까지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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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4세

어머니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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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15세

기생집 수양딸로 보내져 평양 기생권번에 입적 *수양딸 : 증언 당시 김학순이 사용한 표현을 차용

평양 기성권번

평양 기성권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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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봄

17세 봄

양아버지와 중국으로 돈벌이를 나서다 일본군에 연행됨 * 양아버지: 증언 당시 김학순이 사용한 표현을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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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가을

17세 가을

조선인 남성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하고 함께 중국 일대를 전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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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18세

상하이에 정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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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19세

첫째 아이를 출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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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22세

둘째 아이를 출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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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23세

인천항으로 귀국하여 서울 장충단 수용소에서 지냄. 첫째 아이를 병으로 잃고 서울 종로구 충신동에 정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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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31세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던 중 사고로 둘째 아이를 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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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38세

전라도로 거취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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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58세

서울 충신동에서 식모살이와 취로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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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68세

1991.7.22. \ 정대협을 처음 방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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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세

1991.7.22. \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공개증언함

김학순 공개증언 현장, 1991.08.14., 사진

김학순 공개증언 현장, 1991.08.14.,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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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세

1991.7.22. \ 정신대 신고전화 개통식에 참석함

신고전화 개통식에서 김학순, 1991.9.19., 사진

신고전화 개통식에서 김학순, 1991.9.19., 사진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오랜침묵의얼음을깬김학순의증언은다른피해자들이나타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피해 사실을 숨기고 힘겹게 살아왔던 피해생존자들이 김학순의 증언 소식을 접하고 용기를 얻었다. 〈정대협〉과 한국여성단체 3곳의 ‘정신대 신고전화’ 개통을 시작으로 전국 지자체에서 신고접수가 이루어졌다. 김학순의 공개증언을 통해 드러난 식민지와 전쟁범죄의 역사적 실체는 해외에까지 대서특필되어 다른 국적의 피해자들도 일깨웠다. 한반도 출신의 송신도가 일본에서 등장하고, 네덜란드 출신의 얀 루프 오헤른도 피해 사실을 드러낸다.

김학순은이후전쟁범죄에대한일본의책임을묻고역사적진실을 추구하는 길의 선봉장이 되었다. 1991년 12월, 군인·군속·위안부 등으로 강제 동원된 다른 피해자 및 유가족과 함께 최초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아시아태평양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각국 피해자들의 소송이 잇따른다. 1992년 황금주의 UN 인권소위원회 증언, 1993년 김복동의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증언, 2007년 이용수의 미국 하원 증언이 이어졌고, 이를 토대로 유엔 등 국제기구의 각종 권고안과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각국 결의안이 연달아 채택된다.

피해자의목소리는인종과젠더,언어와국적의경계를넘어전 세계로 공명되어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성장과 확산에 기여한다. 재일조선인 여성들도 모임을 결성해 일본 내 최초의 증언집회 개최, 일본 내 피해자 신고전화 개설, 진상규명 등을 주도한다. 피해국과 가해국 여성들의 연대체인 아시아연대회의(1992)가 2018년 15차까지 진행되고, 2000년에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도 개최될 수 있었다.

1991

68세

1991.12.6. 도쿄지방재판소에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을 제소함

68세

오사카 '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에 참석함

제29차 특별전 '조선침략과 강제연행'전 문화포럼 참석 의뢰, 1991.10.16., 종이

제29차 특별전 '조선침략과 강제연행'전 문화포럼 참석 의뢰, 1991.10.16., 종이

68세

오사카 '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에 참석함

일본 오사카. 일본 최초의 증언집회 사진('"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 참석),1991.12.6., 사진, 기증 김혜원

일본 오사카. 일본 최초의 증언집회 사진('"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 참석),1991.12.6., 사진, 기증 김혜원

68세

오사카 '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에 참석함

일본 오사카. 일본 최초의 증언집회 사진('"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 참석),1991.12.6., 사진, 기증 김혜원

일본 오사카. 일본 최초의 증언집회 사진('"종군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후책임" 기자회견 참석),1991.12.6., 사진, 기증 김혜원

68세

고베 증언집회에 참석함(YWCA와 일본기독교교단 학생센터 주관)

68세

도쿄 증언집회에 참석함(우리여성네트워크 주관)

68세

사카이 증언집회에 참석함

68세

오사카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초청 위로회에 참석함

68세

조선인종군위안부의 증언을 듣는 모임에 참석함

구 조선인 종군위안부의 증언을 듣는 모임(주최: 12.12실행위원회), 1991.12.12., 사진

구 조선인 종군위안부의 증언을 듣는 모임(주최: 12.12실행위원회), 1991.12.12., 사진

68세

나라 증언집회에 참석함

68세

일본의 전후책임을 생각하는 효고의 모임에 참석함

일본의 전후책임을 생각하는 효고 모임, 1991.12.15., 사진

일본의 전후책임을 생각하는 효고 모임, 1991.12.15., 사진

1991

68세

미야자와 총리 방한 맞이 피해보상촉구 시위에 참여함

1992

69세

적십자병원에 입원함

69세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 제8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함

올해의 여성상 수상하는 김학순, 1992.3.8., 사진

올해의 여성상 수상하는 김학순, 1992.3.8., 사진

69세

정신대할머니자치모임 '무궁화자매회'를 결성하고 총무를 담당함

1992년 경로제에서 김학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임인 무궁화자매회가 결정되었다, 1992.5.1., 사진

1992년 경로제에서 김학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임인 무궁화자매회가 결정되었다, 1992.5.1., 사진

69세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첫 공판에 참석함

69세

일본 총리부를 방문하여 보상 요망서를 제출함

69세

태평양전후처리 촉구대회에 참석함

69세

종군위안부 실태조사를 위한 일본 혼슈와 중국 동북부 현지조사 보고회에 참석

69세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함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한 김학순, 1992.8.10.-11., 사진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한 김학순, 1992.8.10.-11., 사진

69세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함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보고서, 1992, 문서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보고서, 1992, 문서

69세

도쿄 전후보상국제공청회에 참석함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 1992.12.9., 사진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 1992.12.9., 사진

69세

UN 인권소위원 특별보고관 테오 반 보벤과의 간담회에 참석함

테오 반 보벤과의 간담회, 1992.12.11, 사진

테오 반 보벤과의 간담회, 1992.12.11, 사진

1992

69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한일 외무장관회담 시위에 참여함

1993

70세

호소카와 총리 방한을 맞이하여 한일 정상회담장 앞에서 항의시위에 참여함

70세

제9차 재판을 위해 도쿄지방재판소에 출석함

1994, 사진

1994, 사진

1994

71세

전후보상 6.6집회에 참석함

전후보상 6.6집회에서 발언하는 김학순, 1994.6.6., 사진

전후보상 6.6집회에서 발언하는 김학순, 1994.6.6., 사진

71세

일본에서 하타 총리를 면회함

71세

전후보상 국제포럼에 참석함

94 전후보상 국제포럼, 1994, 사진, 기증 양징자

94 전후보상 국제포럼, 1994, 사진, 기증 양징자

71세

전후보상 국제포럼에 참석함

94 전후보상 국제포럼, 1994, 사진, 기증 양징자(2)

94 전후보상 국제포럼, 1994, 사진, 기증 양징자(2)

71세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에 참여함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 1994.09., 사진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 1994.09., 사진

71세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에 참여함

구리하라 께이꼬가 김학순에게 쓴 편지, 오사카의 기자 구리하라 께이꼬가  김학순에게 쓴 편지. 사진과 월간지 창우신문 10월호를 함께 동봉함, 1994.10.25., 문서

구리하라 께이꼬가 김학순에게 쓴 편지, 오사카의 기자 구리하라 께이꼬가 김학순에게 쓴 편지. 사진과 월간지 창우신문 10월호를 함께 동봉함, 1994.10.25., 문서

71세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에 참여함

창우신문 1994년 10월호, 구 '위안부' 눈물의 단식 투쟁 / 한국인 할머니들 6명 개인보상 요구, 1994.10.20., 문서

창우신문 1994년 10월호, 구 '위안부' 눈물의 단식 투쟁 / 한국인 할머니들 6명 개인보상 요구, 1994.10.20., 문서

71세

일본에서 하타 총리를 면회함

1994

71세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출연함

1995

72세

3.1기념 정대협 5주년 토론회에 참석함

1996

73세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에 참여함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에 참여함, 1996.10.18., 사진

일본국회 앞 전후보상 촉구 단식투쟁에 참여함, 1996.10.18., 사진

73세

히로시마 증언집회에 참석함

73세

일본전범입국금지 세미나에 참석함

1997

74세 1997.12.16.

병원에서 6개월간 투병하다 지병인 천식으로 사망함

우리여성네트워크가 김학순에게 쓴 추도문, 1997.12.18., 문서

우리여성네트워크가 김학순에게 쓴 추도문, 1997.12.18., 문서

1997

74세 1997.12.16.

병원에서 6개월간 투병하다 지병인 천식으로 사망함

김학순 장례식 참가자 일동이 작성한 추도문 ; 고 김학순 할머니 이제 평안하십시오, 1997.12.18., 문서

김학순 장례식 참가자 일동이 작성한 추도문 ; 고 김학순 할머니 이제 평안하십시오, 1997.12.18., 문서

수요시위참가는물론단식투쟁,법적투쟁,국내외증언집회참석등
활발하게 운동에 참여했던 김학순은 1997년 12월 16일, 그토록
고대하던 일왕의 사죄를 받지 못하고 지병이던 천식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살던작은임대아파트의한쪽벽면에는활동당시사진들로 가득했다.

김학순의용기와첫번째공개증언일을기려2012년제11차
아시아연대회의는 8월 14일을 세계일본군‘위안부’ 기림일로 지정했고,
2018년, 대한민국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여성인권운동가 김학순.
이제 그 의미를 기억하고 계승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넘겨졌다.

도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권 표지
기억하겠습니다. 표지
왜, 우리는 지금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가